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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1

オール韓国で日本を屈服させた日【下院決議を振り返る】





キッシンジャーだったかド・ゴールだったか、国家に真の友人はないと言い切ったらしい。

韓国がいくら日韓友好などと言っても、鳩山由紀夫ではあるまいし、彼らだって国家間の友情や「暗黙の約束」よりも自国の都合を優先して行動しているのである。櫻井よしこは河野談話は問題の幕引きを図るという日韓の暗黙の了解のもとで出されたと分析しているが、その真偽はともかく、実際にはアメリカで慰安婦決議が採択されようとしていた時、駐米韓国大使館はそんな暗黙の了解などお構いなく日本を追い込む形で動いていたのである。 

河野談話当時、官房副長官だった石原信雄が「こういうもの(河野談話)をいったん出すと悪用される危険はある。外交関係とはそういうものだから。だけど、あまりにもひどい」と嘆いても後の祭りなのである。

韓国政府は幕引きを図るどころか、アメリカの対日非難決議の採択を成功させる為に24万ドルを投じて活動家を支援していたのである。なお、この時活躍した韓国の外交官には、後に韓国政府から勤政褒章が送られている

C・サラ・ソーは「賠償問題(慰安婦問題)に絡む活動家団体の庇護者」であったとして韓国の議会を非難したが、議会だけでなく韓国政府からして活動家たちと共闘関係にあったわけだ。

121連合のアナベル・パクやアメリカの韓国人(系)有権者団体のキム・ドンソクについては、このブログでも何度か取り上げているので、復習が必要な人はリンクを辿ってみて下さい。

全てがこの記事の通りだったわけではないだろう。いくつか素人目にもオカシイ所はある。しかし、この外交的敗北を反省する材料として、一定の価値はあるはずだ。今回も長いので分割してupする。今回は第1回。


在米韓国人同胞「草の根署名運動」日本の巨大ロビー勝つ

[世界日報] 米国下院で2007年通過した日本軍慰安婦決議案はワシントンで韓国と日本間に広がったロビー戦争の決定版だ。 日本は総理まで立ち上がって慰安婦決議案を阻止しようとし、韓国は外交官と僑胞(海外在住韓国人)、ロビイストが組織的に対応した。

◆総理が指揮する日本のロビー

駐米大使館のキム・ウンソク議会担当参事官(現外交通商部エネルギー資源大使)は2007年1月31日教師出身のマイケル・ホンダなど議員7人を説得して米下院に慰安婦決議案を提出す るようにした。 「スクライブ ストゥレティジス&オドゥバイジョス」のロビイスト、トーマス・キムが水面下で動いた。 駐米大使館はスクライブと1年間24万ドルで契約した。

日系のホンダ議員はカリフォルニア州議員時期南京事件と米軍POW(戦争捕虜)と関連した決議案を提出したし、彼自身が太平洋戦争犠牲者であった。 驚いた日本は直ちに対応した。 麻生太郎日本国外務大臣(当時)は「客観的事実に全く基づかずはなはだ残念」としながら反発した。

引き続き2月15日米下院で慰安婦聴聞会が開催された。 世論の呼応度が高まりながら米議会で慰安婦決議案が通過される可能性が高くなると、日本は総理が自ら立ち上がって対米ロビー活動を指揮した。 安倍晋三総理は2月中旬世耕弘成広報補佐官を米国に派遣して学者と有力新聞編集責任者、政府関係者たちに決議案の問題点を知らせした。 彼はまた、小池百合子安保補佐官にもワシントン政界を回り決議案に対する憂慮を伝えた。

選挙を控えて政治的危機を感じた安倍総理は、3月1日「第二次大戦当時、慰安婦を強制動員したという証拠はない」と電撃発表した。 安倍総理の発言は米国の議員たちを刺激した。 安倍総理の発言直後、決議案推進に反対していた共和党議員10人が賛成に回り、背を向けた。 3月末決議案共同提案者が69人に増えた。

◆同胞らの草の根運動

在米同胞らと駐米大使館、ロビイストが集まってタスクフォース(TF) 「121連合」を構成した。 121は下院に提出された慰安婦決議案の名称HR121から取った。

ニューヨーク・ニュージャージー韓国人有権者センターのキム・ドンソク所長は草の根運動を本格的に拡大。 ニューヨーク汎同胞対策委(汎国民対策委)を発足した。 ワシントンとロサンゼルスでも汎国民対策委が構成された。 在米同胞らと直間接で関係を結んでいた中国同胞団体とベトナム同胞団体などアジア市民団体らも加勢した。

「121 連合」看板のもとで一つになった韓国人同胞らは「慰安婦決議案ロビデイ」を決めた。 2007年3月22日米全域から韓国人同胞たちがワシントンに駆せ参じた。 彼らは下院議員事務室を訪問し、太平洋戦争で蹂躙された女性の人権を説明して議員らに決議案共同署名を要求した。

日系上院議員ダニエル・イノウエの阻止で決議案採択推進が遅れるや、すぐに広報専門家ソ・ギョンドク氏が登場。 彼は「ワシントン ポスト」(17日付2面)にマイクの前で涙を拭う慰安婦ハルモニの姿を現わした広告をのせた。

◆日本の逆ロビー

日本はHogan & HartsonHecht, Spencer and Associates(HSA)をロビー会社として雇った。 ホーガン&ハートソン所属のロバート・マイケルは14年間共和党の下院院内総務を務め、第2次大戦に参戦した勇士で大統領自由勲章等 を受賞した。 米法務部の外国エージェント登録法(FARA)により申告された契約書によれば、ホーガン&ハートソンはマイケルの業務に対し、時間当り最高額の 650ドルを日本大使館に申請することで契約した。 マイケルは共和党界下院議員らに会い、慰安婦決議案が米日関係に打撃を与える警告した。

日本は民主党を攻略するために駐日米国大使出身の大物政治家トーマス・フォーリーを活用した。Akin, Gump, Strauss, Hauer & Feld社のフォーリーは30年間民主党で院内総務、院内代表(?)、下院議長などの要職をあまねく経験した大物だった。

日本のロビイストたちは議員会館事務室を歩き回りながら日本がアジア女性基金を発足して元慰安婦たちに十分に補償金を与えたし、日本総理が公式に謝罪したという新聞記事を配り逆ロビー活動を繰り広げた。 日本側ロビイストはジェフ・ビンガマン上院議員、Amy Klobuchar上院議員、Norman D. Dicks下院議員などを接触した。 ニューヨークの日本総領事館は「ダニエル・J・エドルモン」と契約し、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ウォールストリート・ジャーナル、ワシントン・ポストなどの言論を管理した。

日 本の国会議員40人は6月14日ワシントンポストに「THE FACT」というタイトルの広告を出した。 「慰安婦動員に強制はなく、慰安婦はもてなしてもらった(위안부 동원에 강압이 없었고, 위안부는 대접을 잘 받았다)。 米国も日本占領時に慰安所設置を要請したではなかったか」という内容だった。

これにディック・チェイニー副大統領は「非常に腹立たしい広告」として補佐官らに経緯を把握するよう指示した(引用者注: チェイニーはミンディ―・コトラーにこの件を確認し、コトラーは「日本の歴史歪曲」の状況を説明したと中央日報は伝えている)。 海軍は「米海軍が慰安所を日本に要請した」という宣伝文句に対して「全く事実無根」としながら反論声明を出した(引用者注: この部分は確認できない)。

 ◆慰安婦決議案初めての米議会通過

世論の関心が増すやホロコースト(ユダヤ人大虐殺)生存者のトム・ラントス下院外交委院長が慰安婦決議案の常任委上程を電撃宣言した。 彼を動かしたことはキム・ドンソク所長とパン・ギムン国連事務総長だったことが分かった。 下院外交委は6月26日慰安婦決議案を通過させた。

その間決議案に反対した議員らが賛成しながら共同署名議員は167人に増えた。 2月聴聞会で日本擁護発言をした데이나 로러배커(Dana Rohrabacher?)下院議員(カリフォルニア)はロサンゼルスの海外同胞らが地域有権者1200人の署名を押しこみ、圧迫すると、すぐに共同発議に署名はできないが表決に付されれば賛成表決すると約束した。

参議院選挙を控えた日本の政権は粘り強くロビーした。 参議院選挙後に慰安婦決議案表決を先送りしてくれと米議会にしつこくねだった。 結局下院は日本の選挙が終わった翌日まで慰安婦決議案を表決に見送った。

2007年7月30日米下院本会議場. ラントス委員長が提案説明をした後賛成討論が長く続いた。 一人も反対討論に出なかった。 決議案は全員一致で通過した。 この日安倍晋三政権は日本の選挙で大敗した

イ・ヨンス・ハルモニとロビイスト、外交官たち、草の根運動を主導した人々がバージニア州韓国人タウン エノンデイルに集まって祝いパーティーを開いた。 イ・ヨンス・ハルモニはこの良い日そのまま過ぎ去ることができないとしながらマイクを捉えた。

「およそ五百年(?)生きながらこのようにうれしい日があったのか。 アリラン アラリが出たよ~.」

米下院アジア太平洋地区環境小委員会のエニ・ファレオマバエガ委員長はイ・ヨンス・ハルモニの音調に合わせて踊った。 ファレオマバエガ委員長は韓国人同胞たちの驚くべき政治力を実感したとし感歎詞を吐き出した。 米議会の慰安婦決議案通過は米国で韓国人同胞らの政治的可能性を確認する契機になったし、米議会ロビーの必要性を悟るようにした事件になった。

ハン・ヨンゴル記者

世界日報2011.1.10

[한국정부의 대미 로비 리포트] ②한일간 로비전쟁된 위안부결의안

세계일보 | 입력 2011.01.10 21:01 | 수정 2011.01.11 09:39

美 한인동포 '풀뿌리 서명운동'이 日 거대로비 이겼다

[세계일보]

미국 하원에서 2007년 통과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은 워싱턴에서 한국과 일본 간에 벌어진 로비전쟁의 결정판이다.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서 위안부결의안을 저지하려 했으며, 한국은 외교관과 교포, 로비스트가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총리가 지휘하는 일본의 로비

주 미대사관 김은석 의회담당 참사관(현 외교통상부 에너지자원대사)은 2007년 1월 31일 교사 출신인 마이클 혼다 등 의원 7명을 설득해 미 하원에 위안부결의안을 제출토록 했다. '스크라이브 스트래티지스 & 어드바이저스'의 로비스트 토머스 김이 막후에서 움직였다. 주미대사관은 스크라이브와 1년간 24만 달러에 계약했다.

일 본계인 혼다 의원은 캘리포니아 주의원 시절 난징사건과 미군POW(전쟁포로)와 관련된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그 자신이 태평양전쟁 희생자였다. 깜짝 놀란 일본은 즉각 대응했다.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외상은 "객관적 사실에 전혀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심히 유감"이라면서 반발했다.

이 어 2월 15일 미 하원에서 위안부 청문회가 개최됐다. 여론의 호응도가 높아지면서 미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은 총리가 직접 나서서 대미 로비 활동을 지휘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2월 중순 세코 히로시게 홍보보좌관을 미국에 파견해 학자와 유력 신문 편집책임자, 정부 관계자들에게 결의안의 문제점을 알리도록 했다. 그는 또 고이케 유리코 안보보좌관에게도 워싱턴 정가를 돌며 결의안에 대한 우려를 전달토록 했다.

선 거를 앞두고 정치적 위기를 느낀 아베 총리는 3월 1일 "2차 대전 당시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전격 발표했다. 아베 총리의 발언은 미국 의원들을 자극했다. 아베 총리의 발언 직후 결의안 추진을 반대하던 공화당 의원 10명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3월 말 결의안 공동제안자가 69명으로 늘어났다.

◆동포들의 풀뿌리 운동

재미교포들과 주미 대사관, 로비스트가 모여 태스크포스(TF) '121연합'을 구성했다. 121은 하원에 제출된 위안부결의안의 명칭 HR121에서 따온 것이다.

뉴 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풀뿌리 운동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뉴욕 범동포대책위(범대위)를 발족했다.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범대위가 구성됐다. 재미동포들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동포 단체와 베트남동포 단체 등 아시아 시민단체들도 가세했다.

'121 연합' 간판 아래 뭉친 한인동포들은 '위안부 결의안 로비데이'를 정했다. 2007년 3월 22일 미 전역에서 한인동포들이 워싱턴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하원의원 사무실을 방문해 태평양전쟁 때 유린됐던 여성인권을 설명하고 의원들에게 결의안 공동서명을 요구했다.

일본계 상원의원 대니얼 이노우에의 저지로 결의안 채택 추진이 지연되자 홍보전문가 서경덕씨가 나섰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17일자 2면)에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닦는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광고를 실었다.

◆일본의 역로비

일 본은 '호건 & 핫슨'과 '헥트,스펜서 & 어소시에이츠(HSA)'를 로비회사로 고용했다. 호건 & 핫슨 소속인 로버트 마이클은 14년간 공화당 하원원내대표를 지냈으며, 2차대전 참전용사로 '대통령 자유의 메달' 등을 수상했다. 미 법무부의 외국에이전트등록법(FARA)에 따라 신고된 계약서에 따르면 호건 & 핫슨은 마이클의 업무에 대해 시간당 최고가인 650달러를 일본 대사관에 신청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마이클은 공화당계 하원의원들을 만나 위안부 결의안이 미일관계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 본은 민주당을 공략하기 위해 주일 미국대사 출신 거물 정치인 토머스 폴리를 활용했다. '애킨 검프 스트라우스 하우어 & 펠드' 소속인 폴리는 30년간 민주당에서 원내총무, 원내대표, 하원의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다.

◇ 위안부 출신 이용수 할머니(가운데)가 2007년 4월 26일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국제사면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미 의회에 위안부결의안 통과를 촉구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안부 강제징집이 없었다"고 말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날 워싱턴을 방문,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죄송한 느낌"이라며 기존 입장을 수정했다.
한용걸 기자

일 본 로비스트들은 의원회관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일본이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해 위안부 출신들에게 충분히 보상금을 주었으며, 일본 총리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신문기사를 배달하며 역로비를 펼쳤다. 일본 측 로비스트는 제프 빙거먼 상원의원, 에이미 클로버샤르 상원의원, 노먼 딕스 하원의원 등을 접촉했다. 뉴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대니얼 J 에덜먼'과 계약을 하고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을 관리했다.

일본 의원 40명은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사실'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위안부 동원에 강압이 없었고, 위안부는 대접을 잘 받았다. 미국도 일본을 점령했을 때 위안소 설치를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딕 체니 부통령은 "매우 화가 나는 광고"라며 보좌관들에게 경위 파악을 지시했다. 해군은 "미 해군이 위안소를 일본에 요청했다"는 광고문구에 대해 "전혀 사실 무근"이라며 반박 성명을 냈다.

◆위안부결의안 첫 미 의회 통과

여 론의 관심이 증폭되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생존자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 위안부결의안의 상임위 상정을 전격 선언했다. 그를 움직인 것은 김동석 소장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원 외교위는 6월 26일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동안 결의안에 반대하던 의원들이 찬성하면서 공동서명 의원은 167명으로 늘어났다. 2월 청문회에서 일본 옹호 발언을 했던 데이나 로러배커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은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이 지역 유권자 1200명의 서명을 들이밀며 압박하자 공동발의에 서명은 못 하지만 표결에 부쳐지면 찬성표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 정권은 끈질지게 로비했다. 참의원 선거 뒤로 위안부결의안 표결을 미뤄달라며 미 의회에 졸라댔다. 결국 하원은 일본 선거가 끝난 지 하루 뒤에 위안부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2007년 7월 30일 미 하원 본회의장. 랜토스 위원장이 제안설명을 한 뒤 찬성토론이 길게 이어졌다. 한 명도 반대토론에 나서지 않았다.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날 아베 신조 정권은 일본 선거에서 대패했다.

이용수 할머니와 로비스트, 외교관들, 풀뿌리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버지니아주 한인타운 애넌데일에 모여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 좋은 날 그대로 지나갈 수 없다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한오백년 살면서 이렇게 기쁜 날이 또 있었던가.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지구환경소위원회 에니 팔레오마바에가 위원장은 이용수 할머니의 가락에 맞춰 춤을 췄다. 팔레오마바에가 위원장은 한인동포들의 놀라운 정치력을 실감했다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미 의회의 위안부결의안 통과는 미국에서 한인동포들의 정치적 가능성을 확인해주는 계기가 됐으며, 미 의회 로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됐다.

한용걸 기자 icykar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