ページ

2014/10/07

性奴隷問題を作る事で救われた?戸塚悦朗


国連に性奴隷(慰安婦)という言葉を売り込んだ人物として知られる戸塚悦朗が、韓国メディアのインタビューで語った話。なぜ、こういう人間は後を絶たないのか。こういう人たちには共通項があるようである。何よりナイーブな人が多い。弱者の救済に熱中してうつ病を忘れることが出来たと語る戸塚は、慰安婦問題でも贖罪史観に浸ることに生きがいを見い出したのかもしれない。

 小学生の頃「人はなぜ生きるのか」が分からずしばしば考えたが、人生の意味が分からずますます落込んだ。 ・・・ 弁護士になると人権侵害被害者が来始めた。 被害者に会って「こんなに大変な人もいるのか」という考えにうつ病を忘れ、昼夜を忘れて働いた。それで救われた

慰安婦問題、韓国併合条約、安重根問題とぶつかったことは全てhappyだった

彼が慰安婦を性奴隷だと主張するのは、強制もされないのに慰安婦になるはずがないというナイーブな信念である(翻訳は正確でないかもしれない)。

私が女性ならば、日本が戦争で勝てばという感じ(?)で(慰安婦)になることは絶対にない(?)」と考えた。 それは強制でなくてはならず(?)、意思に反することだと考えた。 そうなると誰でも奴隷だと考えるものであり、性問題なので「性奴隷」と命名した

彼は「被害者の証言集を見て判断した」という言うが、慰安婦の証言には自分の意思で行ったと明言しているものもあるし、慰安婦自身が性奴隷と呼ばれることに強い拒否感を示しているというのに、彼は現実よりも自分の信仰を優先する。「慰安婦問題は第二次大戦前の日本の裁判所も認めた犯罪問題だ」、犯罪だから日韓請求権協定の枠外だと無茶を言っている。

とはいえ、彼に俗人の側面がないかと言うとそうでもない。彼は自著「日本が知らない戦争責任」(要確認)や岩上安身のインタビューで「自負心を傷付けられた反動」でこの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ことを告白している。彼の国連での暴走は、A新聞(朝日か?)の記者からも咎められていた(日本が知らない戦争責任)。それに対する反発で、ムキになっている部分もあるようである。独りよがりな正義感で日韓関係を壊したのは朝日新聞や河野洋平だけではない。



[インタビュー] 「国際法上人身売買禁止違反・・・『慰安婦=性的奴隷』明らかに」

[庚戌国辱104年]国際人権法権威 戸塚悦朗(下)

日本の国際人権法の権威である戸塚悦朗弁護士は1992年の2月、国連人権委員会で「日本軍慰安婦は性的奴隷である」と初めて慰安婦問題を国連に提起した人物として有名だ。 彼は去る20日の世界日報とインタビューでも「日本軍慰安婦は強制でないはずはなく(?)、意思にも反する」としながら「性的奴隷であることは明らか」と再確認した。 また、慰安婦問題は日本国内でも犯罪行為で糾弾されたことで、1965年韓国・日本請求権協定で解決されたのではないという点も明確にした。

-どのようにして慰安婦問題を国連に初めて提起することになったか。

「最初から慰安婦問題のために国連で活動したのではなかった。 精神障害者の人権問題の解決のために裁判で敗れる場合、国連規約人権委員会に通知できる『個人通知権』制度を導入しろと日本政府に要求したが拒否された。 個人通報権が導入されなければ被害者を代理した弁護士が国際社会に訴えるほかなく、かえって負担が大きくなるといったが、政府はそれでも>>>>ならないといった。 やむを得ず毎年国連に行って日本の人権問題を提起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かった。 そうするうちに在日朝鮮人と韓国女性たちが助けてくれと言って慰安婦問題に関わることになった」

-初めにはためらったと聞いたが。

「1992年に国連に訴える2年前、社会党の本岡昭次参議院議員の依頼で慰安婦問題を検討したことがある。 しかし、弁護人としてその問題を解いていくことには同意できなかった。 まず被害者が存在しない事件で検討できなかった。 また、国を相手にした訴訟になるほかはないが、当時日本の国内法では勝訴は難しいと考えたからだ。 ところで1991年8月14日キム・ハクスンさんが慰安婦だったことを証言し、1992年の1月に中央大の吉見義明教授が防衛庁の資料館(注:図書館)で日本軍が関与したことを示す資料を発掘して公開した。 弁護人として問題を話すことが義務でだった。 ちょうどその年、国連人権委員会が予定されていて慰安婦問題を扱うことに決めた」

1992年2月、彼は国連人権委員会で日本軍慰安婦は国際法上の人身売買違反とし「慰安婦は性的奴隷」と主張した。 彼の問題提起をキッカケに国連で慰安婦議論が公論化し始めた

-なぜ慰安婦は性的奴隷なのか。

日本軍が関与した資料と被害者証言集を見て判断した。 国連では国際法違反を提起しなければ発言や呼び掛けにならない。 国際人権条約がなかった第2次世界大戦以前に国際法で最も重要視した(された?)人身売買禁止を適用した。 また「私が女性ならば、日本が戦争で勝てばという感じ(?)で(慰安婦を)になることは絶対にない(?)」と考えた。 それは強制でなくてはならず(?)、意思に反することだと考えた。 そうなると誰でも奴隷だと考えるものであり、性問題なので「性奴隷(sex slavery)」と命名した。 「自分の意志で兵士を慰安する」という慰安婦という話はおかしい(?)」

-今国際社会で日本軍慰安婦は性的奴隷という認識が確立されたのか。

確立されている人身売買禁止が国際法で規定したのではないだと主張するのは日本だけだ。日本政府が7月に国連の市民的・政治的権利委員会で日本軍慰安婦は性的奴隷でないと話したことは問題だ。 性的奴隷ではないというのは『慰安婦=売春婦』という話だ。 これは慰安婦被害者を再び侮辱することで、新しい加害だ。 被害者を見れば心が痛む」

-日本は問題がみな解決されたという立場ではないのか。

「慰安婦補償問題が1965年韓国・日本請求権協定で解決されたと言うのは話にならない。 いつかキム・ヨンシク前外相は当時の交渉過程で不法行為の問題に関する議論がなかったとし、「もし不法行為が発見されれば後ほど交渉する」という日本の久保田貫一郎代表が話した議事録を公開した。 日本は関連資料を公開していない。 実際の交渉では経済協力やお金の問題だけが話し合われた。 合わせてお金の問題は解決したが、犯罪問題は解決されなかった。 慰安婦問題は第二次世界大戦前の日本裁判所も認めた犯罪問題だ。 1965年交渉過程で犯罪問題は扱われなかった」

-慰安婦問題の他にも多くの人権問題を訴えてきたが。

「弁護士を始めてから本格的に引き受けた事件はスモン病事件だ。 スモン病は下痢止めを飲んで脚が動かなかったり目が見えなくなる症状だ。 被害者が日本にだけ1万人ほどいた。 弁護士40人余りと共に戦った。 訴訟で勝ち多くの収入を得たが、事務局長のようになりその後大きな収入はなかった。 1982年には精神病(彼は精神障害以外の精神病といった)人権問題を扱うことになったが、メディアなどが注目ぜず国連に訴えることになった」

-国際人権法はどのように研究したか。

「大きな事件に長く関わり弁護士事務室が潰れ(?)、心身共に疲れた。精神科の医師も休んだ方が良いといった。 それで1989年イギリスに留学した。 当初精神保護法を研究しようとしたが途中で国際人権法に変えた。 ロンドン大学大学院で女性で初めて国際裁判所裁判官になったロザリン・ヒギンスの下で国際人権法を勉強した。 1998年から2年間アメリカのワシントン大でも勉強した」

-精力的な人権擁護活動の源泉は何か.

うつ病だ。 小学生の頃「人はなぜ生きるのか」が分からずしばしば考えたが、人生の意味が分からずますます落込んだ。 心理学の大学院で進学したが、父の助言で法学部に変わった。 弁護士になると人権侵害被害者が来始めた。 被害者に会って『こんなに大変な人もいるのか』という考えにうつ病を忘れ、昼夜を忘れて働いた。 それで救われた

-今はどうか.

「人間は必ず死ぬ。 だから意味あることをしなくてはいけない。 ヒギンスに『慰安婦問題があるが、どう考えれば良いのか』で尋ねたところ、にこにこ笑ったよ。 『おもしろい問題にぶつかったわね』『図書館に行いきなさい』で言われた。 図書館で数多くの問題にあたり、新しい発見が続いた。 新しい事実を発見して研究することの楽しみを経験した。 慰安婦問題、韓国併合条約、安重根問題とぶつかったことは全てhappyだった。”

4時間30分間のインタビューが終わる頃、彼は明るく笑った。 本当にハッピーに見えた。インタビューが終わった後で、その日の埼玉の気温が37度だった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知った。 すでに腕と顔が赤くなり、後で火照った。

世界日報 2014.8.30 [魚拓]

[인터뷰]“국제법상 인신매매 금지 위반… ‘위안부=성노예’ 분명”

[경술국치 104년] 국제인권법 권위자 日 도쓰카 에쓰로 (下)

관련이슈 : 세계일보 영상뉴스
일본의 국제인권법 권위자인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변호사는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라고 처음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제기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20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가 되지 않으면 될 수가 없고, 의사에도 반하는 것”이라면서 “성노예가 분명하다”고 재차 확인했다. 또한 위안부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범죄행위로 규탄받은 것으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처음 제기하게 됐나.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를 위해 유엔에서 활동한 건 아니었다. 정신장애자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재판에서 패할 경우 유엔 규약인권위원회에 통보할 수 있는 ‘개인통보권’ 제도를 도입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개인통보권이 도입되지 않으면 피해자를 대리한 변호사가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밖에 없어 오히려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했지만, 정부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매년 유엔으로 가 일본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재일 조선인과 한국 여성들이 도와달라고 해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게 됐다.”

-처음에는 머뭇거렸다고 들었는데.

“1992년 유엔에 호소하기 2년 전, 사회당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의 의뢰로 위안부 문제를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변호인으로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엔 동의할 수 없었다. 우선 피해자가 없어 사건으로 검토할 수 없었다. 또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될 수밖에 없는데, 당시 일본 국내법으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1년 8월14일 김학순씨가 위안부였음을 증언했고, 1992년 1월 주오(中央)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가 방위청 자료관에서 일본군이 관여한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변호인으로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의무였다. 마침 그해 유엔 인권위가 예정돼 있어 위안부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했다.”

1992년 2월, 그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국제법상 인신매매(트레이드) 위반이라며 ‘위안부는 성노예’라고 주장했다. 그의 문제 제기를 시작으로 유엔에서 위안부 논의가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왜 위안부가 성노예인가.

“일본군 관여 자료와 피해자 증언집을 보며 판단했다. 유엔에선 국제법 위반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발언이나 호소가 되지 않는다. 국제 인권조약이 없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국제법에서 가장 중요시한 인신매매 금지를 적용했다. 또 ‘내가 여성이라면,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위안부를) 절대 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강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의사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노예라고 생각할 것이고, 성 문제여서 ‘성노예(sex slavery)’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의사로 병사를 위안한다’는 위안부라는 말은 웃기는 것이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인식이 확립됐는가.

“확립돼 있다. 인신매매 금지가 국제법에서 규정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일본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지난 7월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문제다. 성노예가 아니라는 건 ‘위안부=매춘부’라는 얘기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다시 모욕하는 것으로, 새로운 가해이다. 피해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입장 아닌가.

“위안부 보상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언젠가 김영식 전 외무장관은 당시 교섭 과정에서 불법행위 문제 논의가 없었다면서 ‘만약 불법 행위가 발견되면 나중에 교섭한다’는 일본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가 말한 의사록을 공개했다. 일본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실제 교섭에서는 경제협력이나 돈 문제만 얘기했다. 아울러 돈 문제는 해결했지만 범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전 일본 재판소도 인정한 범죄 문제이다. 1965년 교섭 과정에서 범죄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 외에도 많은 인권문제를 호소해왔는데.

“변호사 개업 이후 본격적으로 맡은 사건은 스몬병(SMON) 사건이다. 스몬병은 설사약을 먹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증상이다. 피해자가 일본에만 1만명 정도 있었다. 변호사 40여명과 함께 싸웠다. 소송에서 이겨 많은 수입이 들어왔지만, 사무국장처럼 돼 그후 큰 수입은 없었다. 1982년에는 정신병(그는 정신장애가 아닌 정신병이라고 했다) 인권문제를 다루게 됐는데, 미디어 등이 주목하지 않아 유엔에 호소하게 됐다.”


-국제인권법은 어떻게 연구했나.

“대형 사건에 계속 연루되면서 변호사 사무실이 파탄났고 몸과 마음도 지쳤다. 정신과 의사들도 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1989년 영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당초 정신보호법을 연구하려 했지만 중간에 국제인권법으로 바꿨다. 런던대학대학원에서 여성으로 처음으로 국제재판소 재판관이 된 로절린 히긴스에게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1998년부터 2년간 미국 워싱턴대에서도 공부했다.” 

-정력적인 인권 옹호 활동의 원천은 무엇인가.

“울병(우울증의 일종)이다. 초등학생 시절 ‘인간은 왜 사는가’를 알지 못해 자주 생각했지만,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해 점점 침울해졌다. 심리학 대학원으로 진학했다가 아버지 조언으로 법학부로 옮겼다. 변호사가 되니 인권침해 피해자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이렇게 힘든 사람도 있는가’라는 생각에 울병을 잊고, 밤낮으로 일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인간은 반드시 죽지 않는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긴스에게 ‘위안부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싱글벙글 웃더라. ‘재미있는 문제와 부딪쳤다’며 ‘도서관에 가라’고 말해주더라. 도서관에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새로운 발견이 이어졌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위안부 문제, 한국병합 조약, 안중근 문제와 부딪친 것은 모두 해피(happy)였다.”

4시간30분간의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해피’해 보였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야 그날 사이타마 기온이 37도라는 걸 우린 알았다. 이미 팔과 얼굴 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뒤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