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2はるか前に満州で挺身隊(慰安婦)を見た
バタフライ(蝶々)USAとは、アメリカに最近出来た慰安婦支援団体である。KACEやKAFCといった政治系の団体とは性質が異なる。こういったサークルは、本国韓国にも幾つか出来ているが、昨今の慰安婦ブームでアメリカにも次々と誕生(ワシントンやシカゴにも存在するらしい)。彼女たちは韓国の挺対協と繋がっている(詳細は後日)。
で、2013年以降に出来たアマチュア団体が貴重な慰安婦強制動員の目撃者を発見したというのだから話が出来すぎている。しかも、目撃者は彼女たちの膝元アメリカにいたというのである。韓国国内にも慰安婦の強制動員を目撃した人はいない。厳密に言うといないわけではなく、目撃したという罪の意識から名乗り出られないというワケの分からない目撃者しかいない。で、今回の証言者は、日本軍の為に仕事をしたという悔悟から本名を明かせないと言っている。
アンジェラ会長(右)とリンダ・リー副会長
バタフライUSA
しかし、1935年に満州に慰安所というのは、時期的に早すぎないだろうか?第一次上海事変の際、海軍が上海に慰安所を設置したのは事実だが、この老人がいたのは朝鮮に近い満州で、日中戦争(1937~)もまだ始まっていない。また、太平洋戦争中(1941~)朝鮮半島で挺身隊と慰安婦の混同(誤解)があったと言われるが、戦地で慰安婦が挺身隊と呼ばれていたという事実はない。そもそも、女子挺身隊が創設されたのは1943年である。その7~8年前に、日本軍の陣地にトラックで運び込まれる朝鮮人挺身隊(慰安婦)を見たとこの老人は言うのである。
「日帝慰安所惨状、今でも目に鮮明」
「日本軍討伐隊カメラマン」103歳の韓国人証言
朝鮮服着た娘数十人が毎週軍隊に連れて来られた
「今でも目に生々しいんです、朝鮮の幼い少女が苦痛の中に引きずられて来た場面です」今年で103才になった老人は、残酷だった日帝強制占領期を回想して歯ぎしりした。 満州での日帝の蛮行が極に達した1930年代、日本軍のカメラマンとして現場を駆け回ったキム・ジェフン(仮名)牧師は80年近く含んでいた惨状を慎重に語り出した。
日本軍のために仕事をしたという過去に対する悔恨がまだ残っていると、身分を明らかにすることは避けたが、彼の証言には日帝の人権蹂躪に対する告発の声が生々しかった。
12日、ロサンゼルスのコリアタウンのとあるカフェで会ったキム牧師の証言は日本軍慰安婦の真相究明と被害者支援に乗り出した「蝶々(バタフライ)USA LA」(会長 イ・アンジェラ)が後援者の繋がりで1年余りの説得の末実現した。 イ牧師も日本が慰安婦問題について歴史を前にして一貫して嘘をつく(?)のをこれ以上見ていられないと考え証言に臨んだ。
咸鏡南道の甲山郡出身で(?)ロサンゼルスに住む引退した牧師であるキム氏は、24歳だった1935年、満州、延辺図們地区(現延辺朝鮮族自治州の図們市か?)独島(ドクト)守備隊と呼ばれた日本軍討伐隊のカメラマンとして1年間働き現地で目撃した全てを覚えている。
キム牧師は「今は慰安婦という単語自体浄化されている。 その当時は挺身隊、すなわち日本軍に献身するものと呼ばれていた」「その当時、少女を乗せた軍用トラックは1ヶ月に4回、すなわち週に一度の割合で軍中に入った」と言う。
キム牧師は「討伐隊の討伐後、いつも軍用トラックで20~30人余りの少女が軍中に入った。 この中には15才の幼い少女もいたし、全て未婚の少女だった。 彼女たちは全員朝鮮服を着ていて、派手さはなくあどけない様子の田舎娘だった」と話した。続けて「この少女たちには笑顔が全くなく、恐怖で一杯だった。下着を着ずにスカート一つで日に40~50人以上の男を相手にしていた」と証言した。
キム牧師はまた、当時日本軍討伐隊が慰安婦動員はもちろん住民たちを対象にした放火、略奪もはばからなかったと伝えた。
これは本当に涙なしでは見られない胸が痛い場面だと話を繋いでいったキム牧師は「強制的に連れて来られたのは明らかで、実際に目撃し体験した人々がいるのに真実を隠そうとしてはならない」「日本政府は真実を明らかにし、被害者に対する謝罪と補償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彼は「もうこれ以上このような人権の蹂躪が発生しないよう真実を糾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私だけでなく、その当時を証言できる人々が既にとても高齢で、正義を求める若い人々が最後までこの問題の真実が明らかになる時まで戦ってくれるのを伏して願うばかり」と付け加えた。
一方蝶々USA LAはキム牧師の証言を入れた映像を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と共同で真実を糾明する資料として使う予定。
“일제 위안소 참상, 지금도 눈에 생생”
‘일본군 토벌대 사진기자’103세 한인 증언
한복 입은 처녀 수십명 매주 군대에 끌려와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고통 속에 끌려가던 그 장면이요”올해로 103세가 된 노옹은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회상하며 치를 떨었다. 만주에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 일본군의 사진기자로 현장을 누볐던 김재훈(가명) 목사는 80년 가까이 담고 있었던 참상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일본군을 위해 일했었다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신분을 밝히기는 꺼려했지만, 그의 증언에는 일제의 인권유린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12일 LA 한인타운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목사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진실 규명과 피해자 돕기에 나서고 있는 ‘나비 USA LA’(회장 안젤라 이)가 후원자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1년여 간의 설득 끝에 이루어졌다. 이 목사도 일본이 위안부 문제 대해 역사 앞에 거짓으로 일관하는 행태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증언에 임했다.
함경남도 갑산이 고향으로 LA에 거주하는 은퇴목사인 김씨는 24세이던 1935년 당시 만주 연변 도문 지역 독도 수비대로 불린 일본군 토벌대의 사진기자로 1년간 일하면서 현장에서 목격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 목사는 “지금은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도 그나마 단어가 순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신대, 즉 일본군에게 몸을 바친다는 것으로 불렸다”며 “그 당시 소녀들을 태운 군용트럭은 한 달에 4번, 즉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군안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토벌대가 항상 토벌 후에는 군용트럭에 20~30여명의 처녀들이 군 안으로 들어갔다. 이 중에는 15세의 어린 소녀들도 있었고 전부 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화려하지 않은 앳된 시골 소녀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녀들은 웃음기가 전혀 없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고 속옷을 입지 않고 맨 치마만 입으며 하루에 40~50여명의 남성을 상대해 왔다”고 증언했다.
김 목사는 또 당시 일본군 토벌대가 위안부 동원은 물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방화,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 아픈 장면이라며 말을 이어나간 김 목사는 “강제로 끌려온 게 뻔하고, 실제로 보고 겪은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을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 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함께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더 이상은 이와 같은 인권유린이 발생하지 않게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나이를 먹어, 정의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끝까지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투쟁해 주길 간곡히 바랄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나비 USA LA는 김 목사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와 연대해서 진실을 규명하는 자료로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