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によると雨竜第一ダムの建設には連合軍捕虜も動員されたらしい。労働は過酷だったとされているが、朝鮮日報の記事も触れているように日本人も働いていた。現在は近くにあったお寺の本堂が「笹の墓展示館」という名の歴史展示館になっている(写真左)。
これまでにも、韓国と交流のある反戦平和団体などがワークショップを開くなどしていたようであるが、今回は東北アジア歴史財団がここで歴史教師向けのツアーを組んだらしい(写真下、祈っているのが韓国から来日した高校教師たち)。東北アジア歴史財団と言えば、盧武鉉前韓国大統領が設立した抗(?)中、抗日組織でしたね。最近では資源を抗日に集中していると言う話ですが。
記事はかなり割愛してあるので、必要な人は下の原文を参照して下さい。
15から18日にかけて開かれた「東北アジア歴史財団(理事長チョン・ジェソン)第2回東アジア社教員現場研修」は強制徴用の痛みが漂う北海道で執り行なわれた。踏査のテーマは「故郷を失った人々の土地、北海道で会う東アジア」踏査に参加した「歴史教師」 25人は歴史と寒さ、出会いと疎通を行き来しながら本願寺札幌別院~朱鞠内 笹の墓展示館~北海道開拓記念館を現地調査した。ハン・ヘイン建国(コングク)大研究教授(日本近現代史)が招聘講師としてこれらと共にした。
笹野の墓展示館は本来光顕寺という寺(?)だ。第二次大戦が頂点に駆け上がった1938 ~1943年私を近隣の山の麓で戦時中の電力供給のための雨竜ダムの建設が進められ、日本人と共に朝鮮人少なくとも3000人が動員された。 強制労働中に命を失った日本人と朝鮮人死体はここで一夜泊まってから埋葬された。
...強制労働に連行された朝鮮人の人生は南の九州より北の北海道がはるかに気味が悪く大変だった。九州は日本本土と繋がっており逃亡を夢見ることが出来たが、北海道は逃げても島繋がなかったためだ。宿舎を出て幾日も歩き回っても、結局荒野を抜け出すことはできない場合が多かった。日本人に当てられた朝鮮人労働者が朝鮮女性を性的に利用する「産業慰安婦」もいた。 ハン・ヘイン教授は「朝鮮人労働者らが逃げないようにしようと、企業などが料理屋兼慰安所の『チョ・ソンオク』を運営、労働者らに紙切れを与えて使わせた」と説明した...
朝鮮日報2011.2.21
역사 교사, 홋카이도 강제징용 현장 답사
101명의 유골, 3개 함에 뒤섞여… "이 아픔, 제자들에게 전해줄 것"
지난 16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슈마리나이(朱鞠內)에 있는 '사사노보효전시관(笹の墓標展示館·강제노동자료관)'. 가로 60㎝, 세로 30㎝ 크기의 나무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스님이 상자 뚜껑을 열자 갈색으로 변한 팔과 다리 부분 인골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에 슈마리나이에 끌려와 일하다 죽은 어느 조선인은 이제 유골이 되어 한국인 을 맞이하고 있었다. 1997년 8월 절에서 1㎞ 떨어진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이 유골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납골당에 보관 중이었다. 방문자들은 유골 앞에 한국에서 가져간 술을 바치고 두 번 깊이 절했다.
15~18일 열린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 제2회 동아시아사 교원현장 연수'는 강제 징용의 아픔이 서린 홋카이도에서 펼쳐졌다. 답사의 주제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땅, 홋카이도에서 만나는 동아시아'. 답사에 참가한 '역사 선생님' 25명은 역사와 추위, 만남과 소통을 넘나들면서 혼간지 삿포로 별원~슈마리나이 사사노보효전시관~홋카이도 개척 기념관을 답사했다. 한혜인 건국대 연구교수(일본 근현대사)가 초빙강사로 이들과 함께했다.
사사노보효전시관은 원래 고겐지(光顯寺)라는 절이었다. 2차대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1938 ~1943년 절 인근 산자락에서 전시(戰時) 중 전력 공급을 위한 우류댐 건설이 진행됐고, 일본인과 더불어 조선인도 최소 3000명이 동원됐다. 강제노동 도중 목숨을 잃은 일본인과 조선인 시체는 이 절에서 하룻밤 묵다가 매장됐다.
홋카이도 북부 내륙에 자리한 슈마리나이는 영하 41.2도까지 내려간 기록이 있는, 일본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다. 현재도 우류댐은 일본에서 9번째, 건설 당시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댐이었다. 어른 허리 높이만큼 쌓인 눈을 이고 말없이 서 있는 콘크리트 댐을 보며 답사단은 저마다 다른 아픔에 빠져들었다. "너무 추워서 벌레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밴 댐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상처받은 땅, 너무 아프네요.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다…." 너무 아픈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현재의 상처로 남는다.
댐 건설로 인근에는 담수 면적이 2373㏊나 되는 일본 최대의 인공 호수 슈마리나이호가 생겼다. 이날 호수에서는 일본인들이 빙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설정아 광양고 교사는 "아름다운 설경과 아픈 역사가 뚜렷이 대비돼 착잡하다"고 했고, 신선호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연구사는 "일본인들이 끌어올려야 할 건 빙어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라고 말했다.
강 제 노역에 끌려간 조선인의 삶은 남쪽 규슈보다 북쪽 홋카이도가 훨씬 더 징그럽게 힘들었다. 규슈는 일본 본토와 연결돼 있어 도망을 꿈꿀 수 있었지만 홋카이도는 도망가봤자 섬 안이었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와 며칠을 돌아다녀도 결국 허허벌판을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에게 당하던 조선인 노동자가 조선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산업 위안부'도 있었다. 한혜인 교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업체들이 요릿집 겸 위안소인 '조선옥'을 운영, 노동자들에게 딱지를 줘서 사용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답사단은 전날인 15일 오후에는 삿포로에 있는 정토신종 혼간지(本願寺)파 삿포로 별원(別院)을 방문해 조선인 징용자 유골에 조의를 표했다. '별원'은 무명(無名), 즉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조선인·중국인· 일본인으로 여겨지는 101명의 유골은 3개의 유골함에 뒤섞여 일본 신자들만 안치될 수 있는 이곳 납골당 1층 제일 한갓진 자리에 놓여 있었다. 김혜진 전주공업고 교사가 탄식했다. "조그만 납골당에 101명을 한꺼번에 밀어 넣어놓다니…."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답사단의 기억에는 어떤 깨달음이 각인됐다. 허현주 의왕고 교사는 드라마 '싸인'의 한 대사를 인용했다.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하고 살아있는 자는 거짓을 말한다'고 했어요. 유골을 보며 조선인 징용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상상해봤죠. 책에서 읽은 내용과 직접 와서 본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한기와 설움을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