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6

米軍基地村売春 米が日本を責めないのはブーメランを心配しているから? (キャサリン・ムン)


キャサリン・ムン

Sex Among Alliesは97年に上梓された

90年代に在韓米軍の買春問題を英語で告発したキャサリン・ムン。彼女が調査した基地村売春婦は、慰安婦とも呼ばれたが、キム・キッオク教授の調査で日が当たった狭義の(韓・国連軍)慰安婦とはまた異なる。ムンは、「(日本軍の)慰安婦は軍の関与がより直接的だったが、本質的に(日本軍)慰安婦と基地村女性が違わない」と言っているが、狭義の韓国軍慰安婦なら、民間人経営者が間に入っていない分、日本軍の場合よりさらに軍の関与が直接的だったと言えるかもしれない(要確認)。それはさて置き、

基地村売春婦問題と日本軍慰安婦問題の運動が連帯しようとした時、いわゆる「ハルモニ」がこれに反発したこと(思い返せば、イ・ヨンフン教授も「東豆川で体を売っている女と私たちを比較するなんて、あり得ない」「一発殴ってやりたい」と叱られていたものだが)、日本批判の矛先が鈍るのを恐れ韓国政府がこの問題に消極的だったこと、反日民族主義のようなエネルギー源に乏しい為に米軍の買春問題は社会問題化し難いこと(訳が正しければ)など興味深い指摘が少なくない。

「いつ国境を越えて米国に上陸し、沖縄・フィリピンなど他の米軍駐屯地での訴訟を触発するのか分からない」というのはそうかもしれないが、下院決議があるにも関わらず米国政府が日本に対して強く出ないのは、果たしてブーメランを恐れてなのだろうか?

ムンは、韓国人基地村売春婦の役割を補完する外国人女性が、韓国人売春婦よりも不利な立場に立たされている可能性を指摘し、現在進行形の問題にも関心を持つよう訴えている。「(日本軍)慰安婦問題は過去の歴史ではない」と啖呵を切った朝鮮日報はコメントなしですか?そうですか。

キャサリーン・ムン 米国ブルッキングス研究所の初代韓国学研究職(Chair in Korea Studies)「基地村女性問題も普遍的な女性人権と人身売買の観点で見るべき」

「日本軍慰安婦」はよく分かるが、「米軍慰安婦」は馴染みが薄い。しかし、「基地村女性」といえば誰もが頷く。

先月米軍の基地村女性112人が「米軍慰安婦」という名称を掲げ国を相手に訴訟を起こしたという知らせに反応が気になるのは、ブルッキングス研究所初代韓国学チェアであるキャサリン・ムン(50)だった。 ムン博士は米軍基地村売春問題を光を当てた先駆的研究である<同盟の中のセックス 韓米関係の軍隊売春(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s)>の著者だ。

米国生まれた韓国系米国人ムン博士は博士論文の現地調査のため韓国に滞在した1990年にこの女性たちと初めて会った。米軍基地村問題は「政治学徒として感じた倫理的義務感」から選んだテーマだったと言う。 「彼女たちは、韓国社会でインドのカースト制度の不可触民と同じだった」

周辺の引き止めにも東豆川、平沢(ピョンテク)、群山(クンサン)を歩きこの女性たちに会い話を聞き、「私がこんな環境で生まれていたら、私の人生はどう変わっていたのだろう」という思いに謙虚になったと言う。人間としての共感と学者として義務感は、韓米同盟を陰ながら支えてきた恥部を明らかにする作業につながった。

ムン博士は韓国社会のエリートたちと話し、「この女性たちは強制されてそのような仕事をしていたのではない」という通念を破ることが、その当時も今も難しいと言う。

「14才で強姦されて薬を服用すれば事実上強圧的な雰囲気となる。 車に乗せ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らないまま引っぱられて行くなら、それは事実上拉致だ。 一旦基地村に売られれば借金に縛られて抜け出しにくかった。 『雇用契約を結んだ奴隷』と異ならなかった」。

お金を稼ごうと自発的にしたというような話を、日本の右翼も慰安婦女性たちに対してする。 慰安婦は軍の関与がより直接的だったが、本質的に慰安婦と基地村女性が違わないとムン博士は話した。 「法律面で官が管理したか民間が管理したかという(のは?)重要だが、実際的に官と民はほとんど共謀関係にあった」ということだ。

基地村の場合、女性たちの募集に関与しなかったが米軍と韓国政府が女性たちを収容所に追い詰めて性病検査をした点に照らして官の役割を否定するのは難しい

「1970年代に大統領府管理は定期的に基地の村に出て行って女性たちに韓米同盟と国益のために多大な貢献をしていると励ました。 いくつかの米軍部隊は『娯楽』のために基地の村女性たちをバスに乗せ基地内に連れて来る場合もあったし、女性たちの性病検査をした場合もあった。 文献証拠は、韓国政府と米軍がこの慣行の一部に関与し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

ムン博士は「基地村女性のポジションを外国人女性が補っているが、彼女たちは法的地位のために過去の韓国人女性たちに比べ、さらに法の保護を受けることのできない可能性が高い」として現在進行形の問題にも関心を持ってほしいと注文をつける。

慰安婦問題は1990年代の中・後半、韓国市民社会で次第に関心を持たれ「戦時性暴行」を中心にした国際女性運動の流れに乗った反面、基地の村女性問題はまともに注目されることがなかった。

ムン博士は初期に基地村女性問題活動家らと慰安婦問題活動家が連帯しようとしたと振り返った。 だが、慰安婦被害ハルモニが「私たちはこの女性らと違う」と反発して失敗に終わったという。 ムン博士は「韓国政府でも基地村女性問題を扱えば日本に対する道徳的位置づけが弱まることを憂慮して基地村女性問題に相対的に一層消極的だった」と話す。

ムン博士は基地の村女性問題が政治問題(イシュー)化されるのが容易でない条件だということを認めた。「韓国人の日常生活の中で理解することが非常に遠い困難な問題と見なされやすく、絶えずエネルギーを提供する反日民族主義とは違い韓米関係で韓国人を憤怒させる大きな問題がないという点でも、タイミング上良くない」。

それでもムン博士は「女性たちがゴミのような待遇を受け、米軍がアジア女性たちの性を誤った観点で眺める態度が変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で、基地の村女性たちが立ち上がった(?)という知らせに安堵している」と語った。

だが、米国政府は安心できる立場ではない。 女性たちが今のところ米国政府を相手に訴訟を起こしたことではないがそれがいつ国境を越えて米国に上陸し、沖縄・フィリピンなど他の米軍駐屯地での訴訟を触発するのか分からないからだ。 「パンドラの箱」であるということ。

米国の議会が日本に謝罪を要求する決議案まで通過させた慰安婦問題を米国政府が強く提起できないのは、日本との関係だけでなくそれが自身自身に返ってくるブーメランになる可能性があると分かっているからかもしれない

ムン博士は2007年下院慰安婦決議案通過直後のABC放送への寄稿文で「慰安婦政治が国家間に互いに民族主義的攻撃の機会になっているだけ、政府や人々に、戦時下の民間人保護と女性人権改善のために真剣に模索することでは続かないでいる」と書いた。 戦時にしても平時にしても、軍隊の女性に対する性暴行問題を見れば国家は加害者であっても被害者にはなれないのは明らかだ。

京郷新聞 2014.7.20[1][2][3]

캐서린 문 미 브루킹스연구소 초대 한국석좌 “기지촌 여성 문제도 보편적 여성 인권과 인신매매의 관점에서 봐야”

‘일본군 위안부’는 잘 알지만 ‘미군 위안부’는 생소하다. 하지만 ‘기지촌 여성’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달 미군 기지촌 여성 112명이 ‘미군 위안부’란 이름을 내걸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는 소식에 반응이 궁금한 사람은 브루킹스연구소 초대 한국석좌 캐서린 문(50)이었다. 문 박사는 미군 기지촌 성매매 문제를 조명한 선구적 연구인 <동맹 속의 섹스: 한·미관계에서의 군대 성매매> 저자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인 문 박사는 박사논문 현지조사차 한국에 머무르던 1990년 이 여성들과 처음 만났다. 미군 기지촌 문제는 “정치학도로서 느낀 윤리적 의무감”에서 택한 주제였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인도 카스트제도의 불가촉천민과 같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동두천, 평택, 군산을 오가며 이 여성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고 “내가 이들의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에 겸허해졌다고 했다. 인간으로서 공감과 학자로서 의무감은 한·미동맹을 은밀히 지탱해오던 치부를 밝혀내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문 박사는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과 얘기하며 ‘이 여성들은 강제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니다’라는 통념을 깨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다고 했다.

“14세에 강간 당하고 약물을 복용하면 사실상 강압적인 분위기가 된다. 차에 태워져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끌려간다면 그건 사실상 납치다. 일단 기지촌에 팔려가면 빚의 족쇄에 매이고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고용계약을 맺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돈을 벌려고 자발적으로 했다는 식의 얘기를, 일본 우익들도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 한다. 위안부는 군의 관여가 더 직접적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이 다르지 않다고 문 박사는 말했다. “법률적 측면에서 관이 관리했느냐 민간이 관리했느냐는 중요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관과 민은 대부분 공모관계였다”는 것이다.

기지촌의 경우 여성들의 모집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미군과 한국 정부가 여성들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성병 검사를 한 점에 비춰 관의 역할을 부인하기 어렵다.

“1970년대에 청와대 관리는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나가 여성들에게 한·미동맹과 국익을 위해 큰 봉사를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어떤 미군부대는 ‘오락’을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버스에 태워 기지 내에 데려온 경우도 있었고,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한 경우도 있었다. 문헌 증거들은 한국 정부와 미군이 이 관행의 일부로 관여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 박사는 “기지촌 여성의 자리를 외국인 여성들이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법적 지위 때문에 과거 한국인 여성들에 비해 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진행형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시민사회에서 점차 관심을 얻고 ‘전시하 성폭력’을 중심으로 한 국제 여성운동의 흐름을 탄 반면, 기지촌 여성 문제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문 박사는 초기에 기지촌 여성 문제 활동가들과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이 연대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이 ‘우리는 이 여성들과 다르다’고 반발하며 무산됐다고 한다. 문 박사는 “한국 정부로서도 기지촌 여성 문제를 다루면 일본에 대한 도덕적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기지촌 여성 문제에 상대적으로 더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문 박사는 기지촌 여성 문제가 이슈화되기 쉽지 않은 여건임을 인정했다.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해하기 매우 먼 문제로 여겨지기 쉽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반일 민족주의와 달리 한·미관계에서 한국인들을 분노시키는 큰 이슈가 없다는 점도 타이밍상으로 좋지 않다.”

그럼에도 문 박사는 “여성들이 쓰레기처럼 대우받고 미군이 아시아 여성들의 성을 잘못된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안도감을 느낄 입장이 아니다. 여성들이 아직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언제 국경을 넘어 미국에 상륙하고, 오키나와·필리핀 등 다른 미군 주둔지에서의 소송을 촉발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인 셈이다.

미 의회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까지 통과시킨 위안부 문제를 미국 정부가 강하게 제기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 박사는 2007년 하원 위안부 결의안 통과 직후 ABC방송 기고문에서 “위안부 정치가 국가 간에 서로 민족주의적 공격의 기회가 되고 있을 뿐, 정부나 사람들로 하여금 전시하 민간인 보호와 여성 인권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썼다. 전시건 평시건 군대의 여성 성폭력 문제를 보면 국가는 가해자일 수 있어도 피해자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피해자는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