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7

韓国政府は情夫だった [韓国の慰安所とキーセン観光]



現実と理想の間にグレーゾーンを作っていたのは日本政府ばかりではなかった。韓国も米軍もまた建前と本音を駆使して現実に対応しようとした。公娼制度は当時でも違法---よって戦争犯罪であるという「強制連行派」の言い分は建前論の世界でしか通用していない。・・・少なくとも、(建前であっても)韓国やアメリカでは慰安所に「関与」した事で罪に問われた人はいない。しかも、一方では、売春する権利を求めて闘う女性たちもいるのである。

韓国軍の慰安所については今までも指摘されてきた。ハンギョレの記事も、新しい発見として報じている雰囲気はない。新聞記者のレベルならば今や韓国軍の慰安所の存在は知っていて当然なのだろう。それでも日本のケースのみを糾弾し続ける市民団体に苦言の一つも呈しようとはしない。特にハンギョレは、尹貞玉(ユン・ジョンオク)が慰安婦問題を引っさげてデビューした新聞である。


大韓民国政府が情夫だった

売春取り締まるふりをして女性を外貨稼ぎ手段と考えていた韓国政府…朝鮮戦争の時は慰安所設置、独裁政権は駐韓米軍・日本人対象に売春を助長

大韓民国では売春は違法だが、不法でない。 赤線地区の一角に派出所が共存する奇怪な風景は我が国では今更である。 こうした乖離はどうして生じたのか?

その答えの前に国家の二重的売春政策を見る必要がある。 パク・ジョンミ漢陽大HK研究教授(社会学)が今年書いた論文「韓国売春政策に関する研究」は売春に対する国家の意図的沈黙と統制の過程を暴いた。 400ページを越える分厚い論文の中で大韓民国政府は売春に一方の手では不法化の烙印を押しながら、残り一方の手では放任をしたり時には積極的に「情夫」の役割までこなした。

国連軍の為の慰安所運営

売春をめぐる国家のダブルスタンダードは1946年米軍政期まで遡る。 日本帝国主義を押し出した米軍政は先んじた植民統治との差別性を浮き立たせる必要があった。 1946年5月17日に宣言された「婦女子売買または、気売買契約の禁止令」はそのような背景から出た。 公娼制を維持した日帝とは明確に一線を引く措置と見えた。 新生国家の市民はこれを歓迎した。 1946年5月28一致<東亜日報>は「朝鮮が解放されたので…遊郭の女性たちが解放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当然」と報道した。

実際の米軍政の意図は違った。 ロチュィ軍政長官は「(禁止令が)公娼廃止でないのはもちろん、私娼には何の関係がない。 …本人が自発的に結んだ契約の下で従事するのは関係ない」と明らかにした。 すなわち個人が他意によって売春をすることになるのは不法だが、自発的に売春をするならば公娼でも私娼でも関係ないという言葉だった。 米軍は逆に日本強制占領期間の時から維持されてきた接客女性対象登録・検診関連規定をそのまま維持した。 米軍政の関心は韓国の売春女性と接触した米軍たちの間で広がりうる性病を制御するのことに限定された。

公娼制度を公式に廃止した側は新生国家の立法府であった。 南朝鮮過渡立法議員は1947年8月「公娼制等廃止令」を通過させた。「売春禁止主義」を法律で明らかにした最初の事例であった。 ところが法の力は微小だった。 1948年1月<京郷新聞>は「予算は皆無の状態で、中央庁に対し国庫補助を要請したが、これが見込みがなくてただ嘆くばかり」と報道した。
戦争を経て国家は自ら法を破った。 政府の1956年資料を見れば、陸軍本部はソウルと江陵など4ヶ所で慰安所を運営した。 資料で確認された「慰安婦」の 数は79人だった。 1952年この女性たちを訪れた男性は延べ人数が20万4560人だった。 陸軍本部は「(兵士たちが)異性に対する渇望から引き起こされる生理作用による性格の変化などでうつ病およびその他支障を招くということを予防するため」と趣旨を説明した。 チェ・ミョンシン将軍も回顧録「死線を越えて越えて」で「当時私たちの陸軍は志気の盛り上げのために60人余りを1個中隊でする慰安婦対を三,四個運用した」と書いた。
政府は国軍だけでなく、国連連合軍のため「慰安所」も運営した。 <釜山日報>の1950年9月記事を見れば、馬山市が「数日中に市内に連合軍の労苦に報いる連合軍『慰安所』5ヶ所を新・旧馬山に設置することになり、これに対する許可証をすでに発行した」. 当時政府保健婦防疫国で出した「清掃および接客営業衛生事務取り扱い要領」資料でも連合軍慰安所と慰安婦に対する指示事項を含んでいる。 政府が売春を斡旋した「情夫」役割を引き受けたと証言する文書は悲しくも、たくさん溢れていた。

米軍を代替した日本人「キーセン観光」

1960年代登場したパク・チョンヒ政権は「革命公約」で売春取り締まりを強化すると公言した。 1961年に制定された「売春行為など防止法」は新しい政権の意志を表した。 21組でなされた売春行為防止法は国家の売春禁止原則を再確認したことだった。 しかし翌年6月保健社会部は全国104ヶ所に売春を許容する「特定地域」を設置して、その中で9ヶ所をソウルに割り当てたと発表した。 同じ口から簡単に二つの話が出た。

国家はなぜ売春禁止原則を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か? 1961年交通部企画調整官室が出した公文書を見ればその答えがある。 公文書は「現在の我が国で最も容易に誘致できる観光客は駐韓国連軍」とし「外国人相手ホステス」を対象に教養講習を推進するという内容を入れた。 当時米軍兵士は主に日本や香港に休暇で出かけた。 1961年3月13日付の<東亜日報>は「我が国により多くの外貨を落とすようにするという点では、すべての消耗品に国産を充てるのが理想かもしれないが…酒も外国酒、ヌードの女子も外国女子、その上外貨まで使うと…」と嘆いた。 国家の先決課題は「ヌードの女子」を「国産」で代替することだった。 1962年4月25付<ソウル新聞>はソウル市警が「4千人に達する観光接客営業所(ダンスホール・キャバレーなど)のサービス ガールらに対する接客業務教育を実施」したとしその理由が「外国人らにより効果的なサービス」を提供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と報道した。

1966年<新東亜>の記事はいっそ率直だった。 「洋公主が持つ巨大な力がある。 日陰に咲くこれらは皮肉にも私たちの国家政策の至上課題になったかのような外貨獲得の担い手になっている」 <新東亜>は当時全国190ヶ所の国連軍専用ホールから出る外貨が年に1千万ドルに達すると推定した。 1966年当時我が国が貿易で稼ぐ外貨は2億5千万ドルであった。

1970~71年駐韓米軍の規模が1万8千人減った。 政府は非常事態になった。 1971年8月内務長官が各警察に送った公文書で「保健当局と協力して慰安婦の性病予防策を講じて…教養を強化」しろと指示した。 ところが離れる米軍を捉えることはできないさだめだった。 米軍の空席は「キーセン観光」をしに来た日本人が満たした。 1965年韓-日修交が契機であった。 キーセン観光が絶頂に達した1977年韓国を訪れた日本人の96.8%は男性だった。 経済成長に没頭した政府は観光収入と観光客目標値を提示した。 一線旅行斡旋業者にも‘割当量’が落ちた。 目標を達成できなければ各種恩恵が消えたり、激しい場合、許可が取り消しになった。 1979年<新東亜>は「脱線観光がきわめて当然に当局の黙認の下成り立つ。 …妓生パーティーはほとんどすべての日本人観光客らに与えた」と報道した。 もちろん政府もずっと一役買った。 1972年ソウル市の資料を見れば、(引用者注:米軍)基地村接客営業所女性512人、観光料亭接客営業所女性1795人を対象に教育した記録が残っている。

今も変わらぬ国家の原罪

1980年代、国内経済が成長しながら内国人売春「客」の比重は増えた。 1982年夜間通行禁止が解除され、1984年ぜいたく性風俗店に対する規制を緩和した。 売春業者が育つ土壌はより一層肥沃になった。 アメリカのスポーツ週刊誌<ザ・スポーティング ニュース>は1985年10月ソウル オリンピック特別号で韓国料理を紹介してあるホテル食堂で広がった「妓生パーティー」の写真を掲載した。 当時取材過程で政府が便宜を図った事実が明らかになり、波紋が生じたこともあった。 キーセン観光を通じて観光客を誘致しようとする「政策」は当時までも維持されたわけだ。

事実上スローガンに終わった政府の売春禁止政策は1990年代と2000年代を経て少しずつ効力を発揮した。 1996年「売春防止法」と2004年「性売買禁止法」は主要な契機になった。 しかし相変らず売春という違法は「慣行」というマスクを使って2010年代大韓民国街を闊歩している。 その背景には国家が自ら行った「原罪」がある。


ハンギョレ21 2011.11.28号  [B-U]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2011.11.28 제887호]


[표지이야기] 성매매 단속하는 척하며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한국 정부… 한국전쟁 때 위안소 설치하고, 독재정권은 주한미군·일본인 대상 성매매 조장해


대한민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불법이 아니다. 홍등가의 한편에 파출소가 공존하는 기괴한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새삼스럽지 않다. 이런 괴리는 왜 생긴 것일까?


답을 하려면 먼저 국가의 이중적 성매매 정책을 볼 필요가 있다. 박정미 한양대 HK연구교수(사회학)가 올해 쓴 논문 ‘한국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는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의도된 침묵과 통제 과정을 파헤쳤다. 400쪽이 넘는 두툼한 논문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성매매에 한 손으로는 불법화의 낙인을 찍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방임을 하거나 때론 적극적으로 ‘포주’ 노릇까지 떠안았다.


유엔군 위한 위안소 운영


성매매를 둘러싼 국가의 이중적 태도는 1946년 미군정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제국주의를 밀어낸 미군정은 앞선 식민통치와의 차별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1946년 5월17일에 선포된 ‘부녀자 매매 또는 기 매매계약의 금지령’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공창제를 유지하던 일제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 조처로 보였다. 신생 국가의 신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1946년 5월28일치 <동아일보>는 “조선이 해방되었으니… 유곽의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정작 미군정의 의도는 달랐다. 러취 군정 장관은 “(금지령이) 공창의 폐지는 아닌 것은 물론 사창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맺은 계약 아래에서 종사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밝혔다. 즉 개인이 타의에 의해 성매매를 하게 되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다면 공창이든 사창이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미군은 오히려 일본강점기 때부터 유지돼온 접객여성 대상 등록·검진 관련 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군정의 관심은 한국의 성매매 여성과 접촉한 미군들 사이에서 퍼질 수 있는 성병을 통제하는 데 한정됐다.


공창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쪽은 신생 국가의 입법부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8월 ‘공창제 등 폐지령’을 통과시켰다.‘성매매 금지주의’를 법으로 천명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렇지만 법의 힘은 미미했다. 1948년 1월 <경향신문>은 “예산은 전무 상태이고, 중앙청에 대하여 국고 보조를 요청했으나 이것이 가망성이 없어 그저 한탄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쟁을 거치며 국가는 스스로 법을 깼다. 정부의 1956년 자료를 보면, 육군본부는 서울과 강릉 등 4곳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자료에서 확인된 ‘위안부’ 수는 79명이었다. 1952년 이 여성들을 찾은 남성은 연인원이 20만4560명이었다. 육군본부는 “(사병들이)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채명신 장군도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고 썼다.
정부는 국군뿐 아니라, 유엔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도 운영했다. <부산일보> 1950년 9월 기사를 보면, 마산시가 “수일 내로 시내에다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는 연합군 ‘위안소’ 5개소를 신·구 마산에 설치하기로 되어 이의 허가증을 이미 발부했다”. 당시 정부 보건부 방역국에서 내놓은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자료에서도 연합군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다. 정부가 성매매를 알선한 ‘포주’ 노릇을 맡았다고 증언하는 문서는 서글프게도, 차고 넘쳤다.


미군을 대신한 일본인 ‘기생관광’


1960년대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혁명공약’에서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1961년에 제정된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새 정권의 의지를 드러냈다. 21개 조로 이뤄진 윤락행위방지법은 국가의 성매매 금지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보건사회부는 전국 104개소에 성매매를 허용하는 ‘특정 지역’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9개소를 서울에 할당했다고 발표했다. 한 입에서 두 말은 쉽게 나왔다.


국가는 왜 성매매 금지 원칙을 지키지 못했을까? 1961년 교통부 기획조정관실이 내놓은 공문을 보면 답이 있다. 공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이하게 유치할 수 있는 관광객은 주한 유엔군”이라며 “외국인 상대 접대부”를 대상으로 교양강습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휴가를 떠났다. 1961년 3월13일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보다 많은 외화를 떨어뜨리게 한다는 견지에서는 모든 소모품을 국산으로 충당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술도 외국 술이요, 벌거벗은 아가씨도 외국 아가씨, 게다가 외국돈까지 쓰니…”라고 개탄했다. 국가의 선결 과제는 ‘벌거벗은 아가씨’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1962년 4월25일치 <서울신문>은 서울시경이 “4천 명에 달하는 관광접객업소(댄스홀·카바레 등)의 서비스 걸들에 대한 접객업무 교육을 실시”했다며 그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1966년 <신동아>의 기사는 차라리 솔직했다. “양공주들이 갖는 거대한 힘이 있다. 음지에 피어 있는 이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국가정책의 지상 과업이 되다시피 한 외화 획득의 한 역군이 되고 있다.” <신동아>는 당시 전국 190개소의 유엔군 전용 홀에서 나오는 외화가 1년에 1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1966년 당시 우리나라가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외화는 2억5천만달러였다.


1970~71년 주한미군의 규모가 1만8천 명 줄었다. 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1971년 8월 내무장관이 각 경찰에 보낸 공문에서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떠나는 미군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군의 빈자리는 ‘기생관광’을 하러 온 일본인이 채웠다. 1965년 한-일 수교가 계기였다. 기생관광이 절정에 이르던 1977년 한국을 찾은 일본인의 96.8%는 남성이었다. 경제성장에 몰두한 정부는 관광수입과 관광객 목표치를 제시했다. 일선 여행 알선 업체에도 ‘할당량’이 떨어졌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각종 혜택이 사라지거나, 심한 경우 허가가 취소됐다. 1979년 <신동아>는 “탈선관광이 극히 당연하게 당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다. …기생파티는 거의 모든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베풀어졌다”고 보도했다. 물론 정부도 계속 한몫했다. 1972년 서울시의 자료를 보면, 기지촌 접객업소 여성 512명, 관광요정 접객업소 여성 1795명을 대상으로 교육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도 여전한 국가의 원죄


1980년대 국내 경제가 성장하면서 내국인 성매매 ‘고객’의 비중은 늘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고, 1984년 사치성 유흥업소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성매매 업소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은 더욱 비옥해졌다. 미국 스포츠 주간지 <더 스포팅 뉴스>는 1985년 10월 서울 올림픽 특별호에서 한국 음식을 소개하며 한 호텔 식당에서 벌어진 ‘기생파티’ 사진을 실었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정부가 편의를 제공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기생관광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정책’은 당시까지도 유지됐던 셈이다.


사실상 구호에 그쳤던 정부의 성매매 금지 정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효력을 발휘했다. 1996년 ‘윤락방지법’과 2004년 ‘성매매금지법’은 주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성매매라는 탈법은 ‘관행’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2010년대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가가 스스로 저질러온 ‘원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