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8

日本の恥を世界に認識させたは成果--聯合ニュース


慰安婦 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人達には善意の人が少なくない。だから反日だ売国だと単純に決めつけないで欲しい。しかし、善意の人々の奉仕に支えられている上部団体の本質はそんなに甘いものではない。

ナヌムの家の来訪者の半分は日本人。ボランティアで働いている日本人も多い(写真下の人物は日本人ボランティア)。そういった日本人の善意が、もしかしたら変化をもたらしたかもしれないと思っていた時期が自分にもあった。しかし、少なくとも幹部連中の本音は変わっていないようだ。

この部分は朝鮮日報の感想だが、「世界中あちこちを通い・・・日本を単純に経済大国とだけ知っていた人々に(日本が)過去どんな恥かしい過ちを犯したのか認識させたことだけでも少なくない成果であった」。かつてア ン・ビョンジク教授が、挺対協は慰安婦のことを考えるより日本と喧嘩することを望んでいるだけだと言った頃から、彼女たちは変わっていないのかもしれない。

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のユン・ミヒャン常任代表は、18年前、日本軍慰安婦生存者の故金学順(キム・ハクスン)ハルモニの話を新聞で読んで長い戦いに飛び込んだ。

8日挺身隊対策協創立20周年(11月16日)を控えて会ったユン代表は、所感を聞かれると、しばらく感慨に浸った。

「最初に始める時はおよそ5年、長くて10年ならば解決できるものと考えた。20年という時間は夢にも考えなかった。だが、実ににロマンチックで純真な考えだった」

ユン代表は「日本軍慰安婦 問題が幼い子供も理解できる厳然たる犯罪であることが明白で、歴史的事実なので問題解決が難しいと思わなかった」として「しかし国際政治秩序では力がある者が勝つほかはなく、日本の政治システムがとても強固だという事実を悟った」と話した。

彼女は「20年過ぎた今になって見える。天 皇は神聖不可侵の存在なのでその道徳性や名誉は毛頭触ってはいけないが、慰安婦 問題を認めるのはその名誉を汚すことだ。日本でこういう二分法は保守であろうとと進歩であろうと差がない」と付け加えた。

だが、ユン代表は「20年の長い戦いは一つでは勝ちいくさ」として「日本を変えられなかったが、彼らの国家主義や民族主義という巨大な壁の前で被害女性たちが諦めないで自ら運動を牽引してきた」と話す。

世界中あちこちを通い、そこで会った人を感動させ、日本を単純に経済大国とだけ知っていた人々に過去どんな恥かしい過ちを犯したのか認識させたことだけでも少なくない成果であった。

ユン代表は続いて「被害者ハルモニたちが人々の前で笑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も、もう一つの成果だった」と話す。
彼女は「1990年代初め、初めて被害者登録を受けた時に会ったハルモ二たちの顔は土色であったし、ひょっとして誰が分かるか不安に思って幸せでない表情だった」として「今は人々の前で明るく笑って堂々としていて、幼い学生たちには『一生懸命勉強してこの国を丈夫にさせてくれ』で頼むことさえされる」と話した。

1991年に登録を始め、最近まで受け付けた慰安婦被害者は全部で234人。 今年だけで6人が亡くなり、現在の生存している被害者は82人。

2000年代初めには高齢に入り込んだ被害者らが一年に十余人ずつ亡くなった。

こういうことでは被害者らが生きている時何も成し遂げられ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危機感から、2004年から「戦争と女性人権博物館」の建設を急いだ。

被害者のキム・ボクトン(84)ハルモニが政府から受けた補助金を集め1千万ウォンを提供した。 毎月1万ウォンずつ寄付する市民や女子プロバスケット選手たち、修道女らが出て子供たちが貯金箱まで寄付して建設基金15億ウォン、約定金額まで合わせて 17億ウォンが集まった。

ユン代表は「挺身隊対策協が先頭で走ったりしていたが、ここまで来れたのは、後ろから支えた個人後援者たちのおかげ」といった。

1992年に水曜デモを始めた時、人々が送った視線はハルモニと参加者たちを傷つけるくらい冷淡だったが、1995~1996年国 連人権委調査団が日本を訪問して報告書が採択されると見る目も変わった。

それでも障壁がなくなったわけではない。 戦争と女性人権博物館はソウル市が西大門独立公園内に敷地を提供して建築許可を受けて着工式までこぎつけたが、一部独立有功団体らの反発で、まだある挿絵浮かび上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ユン代表は「慰安婦は売春婦で自虐的な歴史観を教えてはいけないという日本右翼の論理と同じだ」として「日本政府に向かって叫ぶぐらい韓 国社会の変化のためにもっと熱心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博物館建設が重要な理由でもある」と話す。



<인터뷰> 20돌 맞는 정대협 윤미향 대표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투지 넘치던 20대에 시작한 싸움이 40대 후반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18년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인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신문에서 읽고 나서 기나긴 싸움에 뛰어들었다.


8일 정대협 창립 20주년(11월16일)을 앞두고 만난 윤 대표는 소감을 묻자 잠시 감회에 젖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한 5년, 길어야 10년이면 해결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20년이란 시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낭만적이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윤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엄연한 범죄임이 틀림없고, 역사적 사실이라서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국제 정치 질서에서는 힘있는 자가 이길 수밖에 없고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지독하게 공고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20년이 지난 이제야 보인다.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이기에 그 도덕성이나 명예는 털끝만큼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데,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는 건 그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런 이분법은 보수든 진보든 차이가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윤 대표는 "지난 20년간 긴 싸움은 한 편으로는 이긴 싸움이었다"며 "일본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피해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운동을 끌어왔다"고 말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을 감동시키고, 일본을 단순히 경제 대국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 과거 어떤 수치스러운 잘못을 했는지 인식시킨 것만 해도 적지않은 성과였다.


윤 대표는 이어 "피해자 할머니들이 사람들 앞에서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또 하나의 성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 초 처음 피해자 등록을 받았을 때 만난 할머니들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혹시 누가 알까 불안해하며 행복하지 않은 표정이었다"며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밝게 웃고 당당하며, 어린 학생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서 이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신다"고 말했다.


1991년 등록을 시작해 최근까지 접수한 위안부 피해자는 총 234명. 올해 들어서만 6명이 숨졌고, 현재 생존해 있는 피해자는 82명이다.


2000년대 초에는 고령에 접어든 피해자들이 한 해에 십여 명씩 세상을 떠났다.


이러다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위기감에 2004년부터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을 서둘러 추진했다.


피해자인 김복동(84) 할머니가 정부에서 받은 보조금을 모아 1천만원을 내놓았다. 매월 1만원씩 기부하는 시민과 여자프로농구 선수들, 수녀들이 나서고 어린이들이 저금통까지 기부해 건립기금 15억원, 약정 금액까지 합해 17억원이 모였다.


윤 대표는 "정대협이 앞에서 뛰긴 했지만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받쳐준 개인 후원자들 덕분"이라고 했다.


1992년 수요시위를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보내던 시선은 할머니들과 참가자들에게 상처를 줄 정도로 냉담했지만, 1995~1996년 유엔인권위 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하고 보고서가 채택되자 시선도 달라졌다.


그렇다고 장벽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서울시가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부지를 내주고 건축허가를 받아 착공식까지 했지만, 일부 독립유공단체들의 반발로 아직 한 삽도 뜨지 못했다.


윤 대표는 "위안부는 매춘부이고 자학적인 역사관을 가르치면 안 된다는 일본 우익의 논리와 같다"며 "일본 정부를 향해 외치는 것만큼이나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 박물관 건립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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