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日前にもお伝えした村山一兵がナヌムの家を解雇されたというニュース。同じ日のハンギョレの記事も追加しておく。連合ニュースと比べて特に新しい情報はないが、ハンギョレの記事の方が、村山に対して同情的かもしれない。ナヌムの家には、日本から抗議のメールや電話が寄せられているらしい。
村山本人は、ナヌムの家の所長や幹事から「日常的に無視・叱責などの精神的圧力」などの「人権侵害的な行動」を加えられていると訴え、「明確な形の謝罪と業務停止解除」を求めている(本人のメール)。 [閉架]
興味深かったのは、彼が支援者に当てたメール [閉架]で、「事務所幹部からの対応は、すべて口頭で、証拠が残らないように行われています」とか「事務所幹部らからの組織的な行為です」と訴えている点か。
どこかで聞いたような話である。
慰安婦ハルモニ9人の憩い場の京畿広州市、退村面の「ナムヌの家」には日本人職員が一人いる。 村山一兵(31)氏は2006年からナムヌの家歴史観研究員で常駐しながらハルモニたちを世話して、毎年2,000人余りに達する日本人訪問客の案内を引き受けた。 2003年交換学生で韓国に来て日本軍慰安婦の真実を知ることになった後、彼が選択した道だ.
彼は国内で「懺悔の象徴」で受け入れられた。 恥ずかしい歴史を冷遇する自身の祖国日本の代わりをして慰安婦ハルモニたちと共に生活しながら、彼女たちの被害事実を通知するために先頭に立ったのである。しかし彼はこの一月、出勤はしても日本人訪問客らを少し離れた場所で眺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去る7日からは、ナムヌの家に出勤すらしないでいる。
村山氏は昨年12月初め無期限業務浄地通知に続き年末には解雇通知を受けた。 村山氏と彼の知人たちは不当解雇と主張する一方、ナムヌの家は合法的手続きを経たという立場だ。 論議は国内の関連団体をはじめとして日本にまで広がった。 彼にどのようなことが起きたのか。
ナムヌの家が明らかにした解雇理由は二種類。 要求されていた始末書二件を提出せず、無断で個人行動したことだ。
村山氏は昨年12月の初めに東京で開かれた慰安婦関連シンポジウムに、許諾なしで参加して慰安婦被害者姜日出ハルモニの通訳などを引き受けた。 ナムヌの家は「日本の家に行くと言っておきながら、行事に参加して事務局を困らせた」と明かした。 しかし村山氏は「ナムヌの家が日本語が不自由な職員を送ることにして日本の主催側も慌てたし姜ハルモニ も不安に思ったので、休暇を出し自腹を切って個人の資格で行った」と説明した。
村山氏とナムヌの家事務局の間の葛藤は事実その間何回もあった。 村山氏は首に名札をかけて通えとの事務局指針を「圧迫感を感じる」という理由で拒否し、韓日強制併合100年だった昨年には、ナムヌの家のハルモニたちに日本大使館の前の水曜デモに日本人たちがたくさん来るという話をして「体の具合が悪いハルモニにまで集会出席を勧めた」として事務局から注意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 ナムヌの家はこの二件に対する始末書を書くよう指示したが、村山氏はまだ提出しないでいる。
お互いに対する沈殿物も依然として残る。 村山氏は「ナムヌの家歴史館の業務を不適切に処理したり、ハルモニたちが集会に出てケガをしたり事故が起きたというわけでもないのに、業務停止と解雇は過度な処分ではないか」と話した。 しかしアン・シングォン ナムヌの家所長は「態度と職務などの面で色々な問題点が指摘したが、改善されなかった」と言い切る。 「解雇時には書面で30日以前に通知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基本原則も守らなかった」(村山氏)、「正確に言えば、解雇でなく3月に再契約をしないということ」(アン所長)など解雇に対する見解も異なる。
村山氏は「一ヶ月間一人で悩んでいた」と明かした。 自身の事情が日本の右翼勢力に知らされてややもすると慰安婦問題に悪用されるかも知れないという憂慮のためだった。 村山氏の報せに接した日本の慰安婦関連市民団体と市民たちは、ナムヌの家に抗議電話とEメールなどを送っている。
「彼が解雇された場合、この間ナムヌの家で実践してきた国際連帯運動に大きい支障が出て、熱い信頼を送ったハルモニたちも不安感を感じるでしょう」(大阪公立高教師)、「若い人々が村山氏の説明をよく理解し、彼がハルモニたちを日本に連れてきて証言するように尽力し、人々に感動を与えて、加害国の男性である彼の話自体も日本の男性たちの(慰安婦関連運動)への参加を増やしている」(ツボカド・ヒロコ)は背中呼び掛けも続いている。
村山氏がナムヌの家を離れるのは単純に職員一人が消えるという問題でない。 彼は100万~150万ウォンの月給を受けながら慰安婦被害者立場を代弁して最前線で韓国と日本の間のメッセンジャーの役割を果たした。 ハン・ホング聖公会大教授は村山氏に「こんな事になって恥ずかしい」と慰労を渡したという。
葛藤にもかかわらず、彼は「再契約が可能ならば、もっといたいと思う」と話す。 仕事を辞めるなら他意でなく自らの決心が必要で、ハルモニたちと整理する時間が必要だという考えからだ。 「ハルモニの一人は『私が死ぬ時まで一緒にいるものと思ったが、必ず離れ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して泣かれました。 病床にいらっしゃった他のハルモニも『お婆ちゃんたちだけ考えろ。 君がこらえてはいけないの』として手をしっかりと捕まえて下さった」。現在ナムヌの家の事務局は、日本語講師として活動中のボランティアを彼の後任に内定した状態だ。
ハンギョレ2011.1.17
위안부 할머니 9명의 쉼터인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는 일본인 직원이 한 명 있다. 무라야마 잇페이(村山一兵ㆍ31)씨는 2006년부터 나눔의집 역사관 연구원으로 상주하면서 할머니들을 돌보고, 매년 2,000여명에 달하는 일본인 방문객의 안내를 도맡았다. 2003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게 된 뒤 그가 선택한 길이다.
그는 국내에서 '참회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하는 자신의 조국 일본을 대신해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한 달 동안은 출근을 하고도 일본인 방문객들을 먼발치서 바라만 봐야 했다. 지난 7일부터는 아예 나눔의집에 나가지 않고 있다.
무라야마씨는 지난해 12월 초 무기한 업무정지 통보에 이어 연말엔 해고 통보를 받았다. 무라야마씨와 그의 지인들은 부당해고라고 주장하는 반면, 나눔의집은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는 입장이다. 논란은 국내의 관련 단체를 비롯해 일본에까지 번졌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눔의집이 밝힌 해고 사유는 두 가지. 요구받은 시말서 2건을 제출하지 않았고, 무단으로 개인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무라야마씨는 지난해 12월 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심포지엄에 허락 없이 참석해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의 통역 등을 맡았다. 나눔의집은 "일본의 집에 간다고 해놓고 행사에 참가해 사무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라야마씨는 "나눔의집이 일본어가 불가능한 직원을 보내도록 해 일본의 주최측도 당황했고 강 할머니도 불안해해서 휴가를 내고 자비를 들여 개인 자격으로 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무라야마씨와 나눔의집 사무국 사이의 갈등은 사실 그간 여러 차례 있었다. 무라야마씨는 목에 명찰을 걸고 다니라는 사무국 지침을 "압박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한일강제병합 100년이었던 지난해에는 나눔의집 할머니들에게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일본인들이 많이 온다는 얘기를 했다가 "몸이 불편한 할머니에게까지 집회 참석을 종용했다"며 사무국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나눔의집은 이 두 가지 일에 대한 시말서를 쓰라고 지시했고, 무라야마씨는 아직 제출하지 않고 있다.
서로에 대한 앙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무라야마씨는 "나눔의집 역사관 업무를 잘못 처리했거나, 할머니들이 집회에 나갔다가 다치거나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업무정지와 해고는 과한 처분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태도와 직무 등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해고 시 서면으로 30일 이전에 통보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무라야마씨), "정확히 말하면 해고가 아니라 3월에 재계약을 안 한다는 것이다"(안 소장) 등 해고에 대한 입장도 다르다.
무라야마씨는 "한 달간 홀로 속앓이를 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사정이 일본 우익세력에 알려져 자칫 위안부 문제에 악용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무라야마씨 소식을 접한 일본 내 위안부관련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나눔의집에 항의전화와 이메일 등을 보내고 있다.
"그가 해고 당할 경우 그간 나눔의집에서 실천해온 국제연대운동에 큰 지장이 생기고 두터운 신뢰를 보낸 할머니들도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오사카공립고 교사), "젊은 사람들이 무라야마씨의 해설을 잘 이해하고, 그가 할머니들을 일본에 데리고 와 증언하도록 도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가해국 남자인 그의 이야기 자체도 일본 남자들의 (위안부 관련 운동) 참가를 늘리고 있다"(쯔보카와 히로코)는 등 호소도 이어지고 있다.
무라야마씨가 나눔의집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직원 1명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100만~150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위안부 피해자 입장을 대변하며 최전선에서 한국과 일본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무라야마씨에게 "이런 일이 있어 부끄럽다"고 위로를 건넸다고 한다.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계약이 가능하다면 좀 더 있고 싶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두려면 타의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심이 필요하고, 할머니들과 정리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할머니 한 분은 '내가 죽을 때까지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꼭 떠나야 하느냐'라며 우셨어요. 병석에 계신 다른 할머니도 '할머니들만 생각해라. 네가 참으면 안 되겠니'라며 손을 꼭 붙잡아 주셨고요." 현재 나눔의집 사무국은 일본어 강사로 활동 중인 봉사자를 그의 후임으로 내정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