ヴァギナ・モノローグスについてwikipediaの助けを借りて解説するならば、「アメリカのイヴ・エンスラーによって構成された一連の脚本、およびそれに基づく芝居の表題」「200人を超える女性達へのインタビューに基づいた作品で、1996年にニューヨークのオフ・ブロードウェイで上演されて以来、世界60ヶ国で感動を生んでいる。大物女優のグレン・クローズやメリル・ストリープも舞台を飾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
2006年に発売された「
バックラッシュ!~なぜジェンダーフリーは叩かれたのか~」(双風舎)の
キャンペーンブログでヴァギナ・モノローグに対する冷めた分析が読める。参考になれば。
慰安婦問題がヴァギナ・モノローグに取り上げ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2007年のアメリカの下院決議騒動の一年前である。YouTubeにも幾つか動画が
Upされている。今回は韓国の女子大生たちがこの「独白」に挑戦した。
300人の外国人と100人の韓国人観客は、朝鮮人女性の被害の実態を知って静まり返り、日本政府に賠償を求める慰安婦の子孫たち(韓国の若者たち)の努力に感銘を受けたかのように拍手した、と記者は伝えている。
機械翻訳で正確なニュアンスは読み取れないが、父親の身の安全や命と引換えに慰安婦に徴発されたというイメージだろうか?
慰安婦女性たちに申し訳ないと話します
私たちの話はただ私たちの胸中だけで存在します。 私たちの荒れはてた魂中で、戦争の時間と空間の中で、そして空に存在します。 どんな記録の跡もなくて公式に書物に紹介されたこともなく、ただ意識の中でただこの話中で…「26日午後4時. 慶南昌原市、龍湖洞(ヨンホドン)、慶南女性能力開発センターで開かれた2011昌原ヴァギナ・モノローグ・イベント会場。
昌原大学校学生10人余りは日本軍の韓国女性に関する暴力の実態を知らせて慰安婦被害ハルモニに対する日本側の公式的な謝罪を要求した。
「私たちが約束されたのは、私が彼らと一緒に行くならばお父さんを生かすことができると、勤め口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と、自分の国を救う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だった。 私たちが見たものは山でもなくて木でもなくて水でもなくて単に黄砂、砂漠だった。私が行かないならば彼らが私を殺すのだと、そこがより良いと。「ヴァギナ・モノローグはタブーとなってしまった女性のセクシュアリティーに関するお話を率直でよどみなく広げてみせ、女性の改革を追求する社会運動の一環だ。
性に対して隠してきた話を気がせいせいするように打ち明けて性暴行と戦争、男性暴力、抑圧と差別に対する問題を濾過することなしに表わし、胸が痛い傷とウィットあふれる話で女性性の本質と女性に対する痛みを吐露する全世界的の行事だ。
2011昌原ヴァギナ・モノローグのイベント会場には昌原に居住する外国人300人余りと韓国人100人余りで盛況した。
世界各国から集まった参席者たちはこの日行事を通じて自分たちが、または、友人が、でなければ誰かを通じて間接的に経験することになった女性たちの多様な被害事例を演劇で見ることになった。
この席で昌原大学校国際関係学と学生たちは第二次世界大戦当時日本軍が韓国の女性たちを対象にどれくらい残忍な蛮行を犯したのかを表現した。
「涙でぎっしり埋まった倉庫、おびえた数千人の少女ら、私の意志と関係なくテンギ(髪飾り)頭は切られて下着を着る時間もなかった。(A warehouse full of tears. Thousands of worried girls. My braid cut against my will. No time to wear panties.)」不明瞭だった場内が静かだった。 出入り口を出入りした人々も位置に立って学生たちの話に耳を傾けた。 数百人の目が10人余りの学生たちに集まった。
「私たちが強制されたのは名前を変えること。 簡単に脱げるようにボタン一つワンピース一着だけ着ること。 一日に日本軍の50人、時にはあまりにも多くの彼ら、野蛮なおかしな男のそれ、私たちが生理をする時もさらに初潮を始める前にも彼らはそのことをしたよ。 あまりにも多かったよ。 一部は彼らの服も脱がないままそのまま自分たちの性器だけ取り出したままあまりにも多くの男たちが。 私は歩くことはできなかったよ。 足を伸ばすこともできなかったよ。 体を曲げ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よ。 何も出来なかったよ」。
「彼らが私たちにうんざりするようにしたこのは、罵ること。 叩き、 捻ること。 血の涙が出るように叩き、私たちが見たものはお手洗いで化学薬品飲んで死のうとする少女. 爆弾に当たって死んだ少女。 銃でうたれ、また合った少女。消毒すること。 約餌期. ほおたたき. 腕力下記. 壁に頭をぶつかる少女. 川岸に捨てられた栄養失調かかった少女。水に落ちて死のうと」。
「私たちに禁止されたのは洗うこと。 動くもの。診察を受けに行くこと。 コンドームを使うこと。 私たちが歩こうとしたことはマラリア、梅毒、淋病、死産、逃げること。 赤ん坊を産むのと育てること。 彼にやめろということ。 結核、心臓疾患、神経衰弱、うつ病」「私たちが食べたことはご飯、味噌汁、たくあん、ご飯、私たちの体は破壊されたし道具になったし不妊になったし穴になったし。 味噌汁。 たくあん。ご飯。ご飯。ご飯。血まみれになったし。 肉になったし。 黙認にあったし。 一人身になった」「私たちに残ったことは何もなかったよ。 永遠に回復できない衝撃を受けたお父さん、結局亡くなったよ。 無一文.。傷。男性嫌悪症、子供もなくて。 家もなくて。 子宮もなくて。 酒、タバコ、罪の意識、羞恥心」
「私たちは慰安婦と呼ばれるよ。 淫蕩な職業を持った女、私たちが感じたことは私の胸がまだぶるぶる震えるということ。 私たちが奪われたことは若い時期、私の人生」
「今私たちは74才、79才、84才、93才、盲、盲、私たちが願うのは今まもなく私たち皆が死ぬ前に私たちの話を世の中が忘れる前に、私たちの頭の中を離れる前に日本政府で話します。 どうか。 すみません。 慰安婦女性たちよ。 私に話します。 あなた方が私に申し訳ないと。 申し訳ないと話します。 あなた方が申し訳ないと話します。 私に話します。 私を見ます。 話します。 申し訳ないと。
10余分間の公演が終わった。 濃厚な静寂が落ちたように悲しくて暗い雰囲気がかばった。 戦争による韓国女性たちの被害事例を伝え聞くことになった外国人らも深い憂いに沈んだようにした。 このような痛みを表わして日本側の謝罪を要求する子孫らに感銘を受けたように一つ二つ起きて拍手し始めた。
場内が拍手の声であふれた。 気勢を出せという声があちこちで聞こえた。 公演を終えた学生たちは力強い応援に感謝の挨拶をして席から降りた。 戦争と女性たちの被害、数多くの人々が体験した痛みを考え直す場であった。
위안부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요 2011 창원 버자이너 모놀로그
"우리들의 이야기는 오직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우리의 황폐화된 영혼 안에서, 전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리고 허공에 존재합니다. 어떤 기록의 흔적도 없고 공식적으로 책에 소개된 적도 없고 오직 의식속에서 오직 이 이야기 안에서…"
26일 오후 4시. 경남 창원시 용호동 경남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열린 2011 창원 버자이너 모놀로그 행사장.
창원대학교 학생 10여 명은 일본군의 한국 여성에 관한 폭력의 실태를 알리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측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 우리가 약속 받았던 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 간다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본 것은 산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단지 황사, 사막이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날 죽일 것이라고, 거기가 더 낫다고."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금기가 돼버린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펼쳐 보이고 여성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의 일환이다.
성에 대해 숨겨온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성폭력과 전쟁, 남성 폭력, 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를 여과없이 드러내며 가슴 아픈 상처와 위트 넘치는 이야기로 여성성의 본질과 여성에 대한 아픔을 토로하는 전 세계적인 행사다.
2011 창원 버자이너 모놀로그 행사장에는 창원에 거주하는 외국인 300여 명과 한국인 100여 명 등으로 성황을 이뤘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참석자들은 이날 행사를 통해 자신들이, 또는 친구가,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여성들의 다양한 피해 사례를 연극으로 보게 됐다.
이 자리에서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학생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한국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드러냈다.
" 눈물 가득 찬 창고, 겁에 질린 수천 명의 소녀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댕기머리는 잘려나가고 속옷 입을 시간도 없었네.(A warehouse full of tears. Thousands of worried girls. My braid cut against my will. No time to wear panties.)"
어수선했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출입문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자리에 서서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백 명의 눈이 10여명의 학생들에게로 몰렸다.
" 우리가 강요 받았던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 쉽게 벗을 수 있도록 단추 하나 달린 옷 한 벌만 입을 것. 하루에 일본군인 50명, 때론 너무나도 많은 그들. 야만적인 이상한 남자의 그것. 우리가 생리를 할 때도 심지어 초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들은 그 짓을 했다네. 너무나도 많았다네. 일부는 그들의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냥 자기들의 성기만 꺼낸 채 너무나도 많은 남자들이. 나는 걸을 수가 없었네. 다리를 펼 수도 없었다네. 몸을 구부릴 수도 없었다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네."
"그들이 우리에게 지겹도록 한 것은 욕하기. 때리기. 비틀기. 피눈물나게 때리기. 우리가 본 것은 화장실에서 화학약품 마시고 죽으려는 소녀. 폭탄에 맞아 죽은 소녀. 총으로 맞고 또 맞은 소녀. 소독하기. 약 먹이기. 뺨 때리기. 주먹질하기.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녀. 강가에 버려진 영양실조 걸린 소녀. 물에 빠져 죽으려고."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씻는 것. 움직이는 것. 진찰 받으러 가는 것. 콘돔을 사용하는 것. 우리가 걸렸던 것은 말라리아. 매독. 임질. 사산. 도망가는 것. 아기를 낳는 것과 키우는 것. 그에게 그만하라고 하는 것. 결핵. 심장질환. 신경쇠약. 우울증."
"우리가 먹었던 것은 밥. 된장국. 단무지. 밥. 우리의 몸은 파괴당했고 도구가 됐고 불임이 됐고 구멍이 됐고. 된장국. 단무지. 밥. 밥. 밥. 피범벅이 됐고. 고기가 됐고. 묵인을 당했고. 홀로 됐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네. 영영 회복하지 못할 충격에 빠진 아버지. 결국 돌아가셨다네. 무일푼. 상처들. 남자 혐오증. 아이도 없고. 집도 없고. 자궁도 없고. 술. 담배. 죄의식. 수치심."
"우리는 위안부라고 불린다네. 음탕한 직업을 가진 여자. 우리가 느낀 것은 내 가슴이 아직도 부들부들 떨린다는 것. 우리가 뺏긴 것은 젊은 시절. 내 인생."
" 지금 우리는 74살. 79살. 84살. 93살. 장님. 장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금 곧 우리 모두가 죽기 전에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이 잊어버리기 전에,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기 전에 일본 정부여 말해요. 제발. 미안합니다. 위안부 여성들이여. 내게 말해요. 당신들이 내게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요. 당신들이 미안하다고 말해요. 내게 말해요. 나를 봐요. 말해요. 미안하다고."
10 여 분간의 공연이 끝났다. 짙은 정적이 내려앉은 듯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가 감쌌다. 전쟁으로 인한 한국 여성들의 피해 사례를 전해 듣게 된 외국인들도 깊은 시름에 잠긴 듯 했다. 이 같은 아픔을 드러내고 일본측의 사과를 요구하는 후손들에게 감명을 받은 듯 하나 둘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장내가 박수 소리로 넘쳤다. 기운을 내라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공연을 마친 학생들은 힘찬 응원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전쟁과 여성들의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아픔을 다시 생각하는 자리였다.
전병칠기자